<씨네 21> 2006년 8월 No. 564

억수 같은 비가 내린 토요일 오후 구본창(53)의 조선 백자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사간동 국제갤러리를 찾았다. 발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거리를 겨우 건너 들어선 전시장은 감쪽같이 평온하여, 오래된 능 속 같았다. 둘러선 벽마다 걸린 달 항아리와 사발, 연적과 종지의 사진에는 물기라곤 없었다. 백자들은 도화지에 2B연필로 그린 소묘처럼 벽과 바닥을 분별하기 힘든 배경 위에 아스라이 형체를 떠올리고 있었다. 숱한 사연은 이제 와선 표면의 희미한 흠집으로 남았을 뿐이었다. 각각의 백자가 어느 박물관에 소장된 어느 시기의 유물인지는 작가에게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구본창의 눈으로 바라본 백자들은 그저 긴 세월 한 서랍에 곱게 개켜져 보관된 수의였다. 자연 나의 발끝도 조문객의 그것처럼 숨을 죽였다.

이번 전시의 영문 제목인 ‘마음의 그릇’(Vessels for the Heart)은 구본창 사진의 여일한 테마이기도 하다. 20대 중반까지 전형적인 모범생의 삶에 몸을 억지로 구겨넣었던 그는 샐러리맨 생활을 청산하고 자신의 소리에만 귀기울이기 위해 먼 나라로 날아갔다. 1985년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미술대학교에서 사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구본창은 작가의 마음을 피사체에 적극적으로 투사하는 작품들을 통해, 사실주의와 ‘예술 사진’ 미학이 주류를 이뤘던 한국 사진계에 새로운 영지를 일구었다. 그의 피사체 뒤에는 항상 어둠상자 저편에서 어깨를 숙인 고독한 남자가 보였다. <화이트><탈><백자> 등 2000년 이후 작품이 보여주는 평정에 다다르기까지 구본창의 사진은 긴 연민과 번민의 늪을 건넜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국외자의 멀미를 전하는 초기작 <일분간의 독백>(1980-1985), <열두번의 한숨>(1985), <긴 오후의 미행>(1985-1990)은, 자기와 닮은 약하고 헝클어진 존재들을 발견하고 위로함으로써 스스로도 치유받으려는 열망을 감추지 않는다. 임종을 앞두고 생기가 증발돼가는 아버지의 육체와 삼각봉투에 담겨 가슴이 눌려 죽은 나비 등을 촬영한 <숨>(1995) 시리즈는 생의 유한함에 대한 애도가 절정에 이른 작품이다. 정점에 다다르자 평평한 고원이 펼쳐졌다. 상처의 아가리를 들여다보던 구본창의 사진은, 언젠가부터 아픔이 흘러나간 흉터와 딱지로 시선을 옮겼다. 바다 밑 바위와 때 묻은 벽을 한장의 추상화로 만든 <시간의 그림>, 먼지만 남은 빈방의 모서리에 몰두한 <인테리어>, 말라붙은 덩굴손이 별자리처럼 반짝이는 <화이트>, 우두커니 선 광대의 가면에 초점을 둔 <탈> 시리즈가 이어졌다. 구본창의 근작들은 담백하지만 여전히 처연하다. 깨어나보니 뺨은 얼룩지고 명치끝은 묵직한데 무슨 서러운 꿈에 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혼곤한 낮잠의 뒤끝처럼.

분당에 자리한 구본창 작가의 스튜디오를 방문한 날은 장마가 한숨을 돌렸다. 손수 디자인한 문패가 걸린 그의 ‘밝은 방’은 비탈진 땅에 걸터앉아 있었다. 4층짜리 건물은 작품과 수집품, 그가 차마 버릴 수 없었던 무수한 물건들로 비좁아 보였다. 1992년 출간된 사진집 <생각의 바다>의 서문 삼아 구본창이 인용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한번 사는 것은 도대체 살지 않는 것과 같다.” 사진은 구본창에게 삶을 한번의 지나침 이상으로 만들어주는 채집이고 콜라주이며 종교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구본창의 시야는 작은 어그러짐 하나도 흘려보내지 못했다. 비에 꺾인 능소화에 마음을 썼고 누가 주렴을 만지작거리자 끈을 내줄까 물었으며 틈틈이 조수들의 일에 참견했다. 구본창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안뜰에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어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 양 유리창에 헛되이 몸을 부딪혔다.

- 지금 무척 평화로운 얼굴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1980년대 셀프 포트레이트(본인을 모델로 삼은 사진)를 보면 지금과 인상이 너무 딴판이라 마치 다른 인물 같던데요.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부적응이 심한 와중에 셀프 포트레이트를 집중적으로 찍으면서 내면으로 침잠한 시기였어요. 만약 그 길로 내처 가라앉았다면 자살을 했거나 사진을 아예 떠났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차츰 작가로서 활동반경을 넓히고 내가 사진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다음부터 편해졌어요. 그것이 얼굴에도 드러난 것이겠죠.

-한창 힘들 때는 창문도 종이로 발라서 가리고 사셨다면서요.

=듣기도 싫고 보기도 싫었거든요. 두부 장사가 와서 딸랑거리는 것도 싫었으니까.

-사춘기를 좀 길게 지낸 편일 것 같습니다.

=아직도 어리죠.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내가 뭘 좀 안다는 건방진 생각은 거의 못해요. 사춘기라고 하니 엊그제 EBS에서 본 다큐멘터리가 생각나네요. 청각장애가 있는데 몸으로 음을 느끼며 온갖 사물로 즉흥적인 음을 만들어내는 영국의 음악가들 이야기였어요. 연주의 목적을 물으니 그 중 한 사람이 “어렸을 때 들었던 기억 속 음을 찾아다니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참 좋았어요. 사진작가의 일도 마찬가지로 어려서 경험한 영상을 재확인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었죠.

-선친께서 섬유사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비교적 풍족한 성장환경이었다는 뜻일 텐데요. 그와 관련해 또 하나 궁금했던 것은, 선생님 작품에 자주 보이는 천이나 섬유가 집안에 실제로 많았을까 하는 점이었어요.

=아버지가 호주에서 양모를 수입하셔서 나염된 양털들이 색색으로 붙어 있는 견본책이 집안에 있었어요. 레드에서 핑크를 거쳐 화이트까지 굵기에 따라 염색한 아름다운 양털들이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게다가 그런 포트폴리오들은 말하자면 외제 책이라 40년 전에 그처럼 장정이 잘 된 책을 접하기도 쉽지 않았거든요. 3남3녀에 누나가 셋이어서 형과 놀았던 기억보다, 누나들이 수를 놓고 색깔을 이용해 숙제를 하거나 노는 모습을 지켜본 기억이 훨씬 많아요. 이제 와서 내가 내성적이었네 이야기하기엔 낯간지럽지만 나는 몹시 외톨이였어요.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발표를 못하는 내 성격이 싫었죠. 예쁘게 생겼다는 소리를 듣곤 했는데 사춘기 때는 내 얼굴을 누군가에게 줘버리고 대신 씩씩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그래서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 평범해지고 싶다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럴 경우 억압하는 대상에 부딪히는 쪽으로 갈 수도 있고, 나만의 표현수단을 찾기도 하는데, 선생님은 사금파리나 자갈 같은 작은 사물을 모으는 것이 유년기의 취미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을 수집하고 콜라주하는 습벽이 작품에도 드러나는 것 같고요.

=마당의 작은 꽃과 강아지, 비 갠 뒤 불어난 도랑에 떠내려오는 깨진 그릇과 유리조각처럼 조그만 존재들과의 대화가 즐거웠어요. 그때부터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고 주워 모았죠.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다면 그런 천성을 계발하지 못했을 거예요. 서울에서는 그게 다 흠이었고 사내자식이 뭘 그리 꼼지락거리고 있냐고 야단맞았는데, 공부하러 간 독일에서는 그 감수성이 바로 내 장점이라고 하니 너무 큰 날개를 달았죠.

-배창호 감독님과 서울고-연세대 경영학과 동기로 긴 인연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서로 은연중에 동류 의식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배창호 감독은 워낙 잘 놀고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고교 시절에는 친하지 못했어요. 배 감독이 그 덩치에도 노래를 좋아해서 합창반은 같이했죠. 서울대반에서 공부하던 배 감독이 막판에 연·고대반으로 왔고 결국 같은 과에 입학해 가까워졌어요. 대학시절에는 연극을 한 배 감독의 부탁으로 <열두 명의 성난 사람들> 포스터와 티켓을 그려주기도 했고요. 졸업한 뒤 둘 다 대기업에 취직했죠. 배 감독은 현대, 나는 대우에 들어갔는데 배 감독이 얼마 뒤 이장호 감독 조감독을 하겠다고 좋은 직장을 버리더라고요. 아마 그 일이 내가 대우실업을 떠나는 큰 계기가 됐을 거예요.

-직장 생활하는 동안 회식 자리가 몹시 괴로웠다고 회고하신 적이 있어요.

=대기업 말단이 다 그렇지만 과장, 부장님 퇴근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주말도 쉬지 못했죠. 회식도 1차로 끝나면 좋은데 차수가 거듭되잖아요. 노래방이 없던 시절이었지만 싫어도 젓가락 두들기며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러야 했는데 끔찍했어요. 예를 들어 난 축구선수라고는 차범근밖에 모르는데 경기라도 있으면 이튿날 회사 와서 모두 축구 이야기만 해요. 이렇게 평생을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해 6개월 남짓 다니다 그만뒀어요. 미술을 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서울에서는 과외하지 않고 다시 미대 입시를 치르는 일이 더 어려웠어요. 학비가 없는 데다 제2외국어로 언어도 공부한 터라, 독일 주재원을 구하는 작은 회사에 들어가 함부르크로 갔죠. 무엇보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무조건 보고 싶었어요. 여기서는 다들 학교 나와 직장 들어가 결혼하고 정석대로 살아가는데, 다르게 사는 사람은 없는지.

“내 앵글에 걸린 사람은 어딘가 아웃사이더처럼 보여요”

-사진은 여타 장르보다 늦깎이 작가가 많은 부문 같습니다. 대략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회화에 자리 잡거나 영화로 뛰어들지 않고 사진의 세계에 정착하는 것 같다고 느끼세요?

=사실 나도 처음부터 사진으로 정한 건 아니었고 회화나 디자인도 좋아했어요. 그런데 몇 달씩 앉아 그리는 작업이 아니라 빨리 결과를 현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진이 내 성격과 맞았던 것 같아요. 비교적 돈 안 들이고 내 노력을 많이 투자 안 하고 어떤 이미지를 ‘훔치는’ 일종의 쾌감과 스릴이 있었어요. (웃음) 지나가다 아름다운 정경이나 사람, 상황을 만나면 내 필름에 나꿔챌 수 있으니까.

-내가 만들지 않았는데 내 것이 된 기분인가요? 1983년 로마에서 찍은 이탈리아 공산당 행사의 사진을 작품집에서 봤습니다. “이때부터 카메라가 내 눈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해설이 붙어 있던데 더 설명해주세요.

=사진을 찍어도 손과 의식이 연결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리잖아요? 그런데 그 작품을 찍을 때부터, 셔터를 누르면 내 생각과 동시에 사진이 찍히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요. 카메라가 내 의지대로 움직여주는 느낌. 노출이나 프레임이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는 결과가 나오고, 카메라가 대체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하는 자신감이 든 거죠. 누구나 그런 단계가 있을 거예요. 영어로 꿈을 꾸면 어느 정도 영어가 익은 거라고 하잖아요. 참, 이번에 백자 찍으면서도 백자 꿈을 꾸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2월에 정말 꿨어요. (웃음) 일기장에 적어두었죠. 내가 미신 같은 걸 많이 믿어요.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작업한 ‘일분간의 독백’은 사진으로 쓴 일기 같습니다. 4장씩 감상의 한 단위로 기획되어 있지만, 8장, 16장씩 봐도 이야기가 생겨서 단편영화의 콘티를 보는 듯했습니다.

=초창기에는 주로 걸어다니면서 한 장짜리 스트레이트 스냅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다 졸업과 귀국을 앞두고 평소 좋아하는 독일 사진작가 안드레 겔프케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해서 품평을 청했는데 그분 말씀이 “사진은 잘 찍었다. 그런데 유럽 어느 작가가 찍었는지,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찍었는지 알 수 없다” 는 거예요. 그 한마디에 불현듯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보람 있겠다 깨닫고 B컷으로 버렸던 슬라이드를 찾고 옛 앨범을 뒤져 나의 이야기로 ‘일분간의 독백’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유럽에서 찍은 ‘일분간의 독백’과 귀국한 뒤 서울에서 작업한 ‘긴 오후의 미행’에 공히 국외자의 느낌이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내 사진에는 항상 그런 느낌이 있을 거예요. 패션 사진이나 배우를 찍어도 내 앵글에 걸린 사람은 어딘가 아웃사이더처럼 보이죠.

-사진과 영화는 불확정적이고 중요해 보이지 않는 순간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통하는 것 같아요. 사진은 그것을 정지시키고 영화는 연결하죠.

=사진도 누구나 처음에는 결정적인 것을 잡으려고 애를 많이 쓰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정적인 것을 버리려고 하죠. 영화도 타르코프스키 작품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영화는 다른 식의 감동이 부족하잖아요. 사진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처럼 결정적으로 아름다운 것만 보는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은 주는 감동이 다르죠.

-인화지를 암실에서 들쭉날쭉하게 재봉해 인체를 찍은 ‘태초에’ 연작(1995)에서는 모델의 얼굴이 프레임 밖에 있거나 천으로 가려져 있습니다.

=일단 인체 시리즈에서 모델의 얼굴이 나오면 필요 없는 주의를 많이 끌게 되니까 피했어요. 개인이 누구이냐보다, 한 인간이 거미줄에 매달리듯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요. 그래도 “모델이 몇 살인지 내기했다”며 전화 걸어오는 아주머니들이 있었어요. (웃음) 미국에서 전시했을 때는 박물관 큐레이터가 모델을 작가 본인이라고 잘못 소개하는 바람에 개막식 때 여성 직원들이 “어떤 사람이 오나” 잔뜩 긴장해 기다리고 있어서 민망했죠.

-포르말린 액에 잠긴 물고기, 박제된 새, 마른 덩굴 등을 촬영한 ‘숨’ 연작은 버려지거나 잊혀지거나 하찮게 이용당한 동식물과 무생물의 흔적을 담았습니다. 그런 예민한 사진을 보면, 전쟁이나 극한의 고통을 겪는 인간의 사진은 선생님의 신경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인간의 고난에는 나도 큰 감동을 받아요. 얼마 전에도 페루의 소아마비 걸인이 삼십 몇 년에 걸쳐 가족을 일구고 사는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혼자 울었어요.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밖으로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차 막히는데 또 어찌 나서나 하는 걱정부터 들거든요. (웃음) 소재를 떠나 밀어붙이는 감정보다 미묘한 떨림을 중요하게 생각하기는 합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자기가 원치 않았는데 어떤 운명에 처한 존재들에게 끌려요.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어주고 싶다는 욕구가 지금까지 작업 밑에 깔려 있어요.

-(창밖 뜰에 눈길이 닿아) 저 꽃은 이름이 뭔가요?

=능소화라고, 아름답죠? 그런데 옛날에는 사약으로 쓰였대요. 저렇게 아름답게 생겼는데 독이 있나봐요. 장마 때 한창 피어나다가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지죠.

“작품은 경험이 어느 순간 모세혈관처럼 합쳐지며 나오는 것이죠”

-선생님은 대개 한 주제를 잡으면 복수의 작품으로 연작을 만드셨죠. 어떤 성향이 원인일까요?

=나는 체계적인 사람은 아니에요. 다만 사진 공부를 한 독일의 수업 경향이 한 주제를 깊이 파고드는 연작 위주였어요. 한 장 우연히 잘 찍은 것은 별로 인정을 안 해주죠. 그보다는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어떤 생각으로 이 작품을 했나 많이 따져요. 항상 이런 노트(기자의 취재수첩을 가리키며)가 중요해요. 아직 시작하지 않은 작품이라도 노트를 발표하면 칭찬해주죠. 내가 가르칠 때도 수업에 나오지 않다가 학기 말에 멋진 작품을 들고 나타나는 학생보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 쪽이 좋아요.

-사진 뒤의 스토리를 요구하는 건가요?

=내 작품도 신문이나 잡지에 난 토막 소식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아요. 이를테면 자연사박물관의 곤충 상자의 형식을 취한 ‘굿바이 파라다이스’ 연작도 1993년인가 신문에서 본 뉴스에서 시작됐어요. 나비 박사 석주명 선생의 누이동생 석주선씨가 전쟁 통에 다른 물건들을 희생하며 지켜낸 죽은 오빠의 연구논문을 40년 만에 책으로 펴냈다는 소식이었죠. 그런데 석주명 박사는 전쟁 전에 수집한 나비 수천점을 다 태워버렸다고 해요. 기사가 준 충격이 평소 자연사박물관 이미지와 겹치면서 작업이 됐죠. 그런가 하면 1998년 ‘탈’ 연작은, 1992년 항공사 기내지에 실린 타이 전통 가면극 사진에 영향을 받았어요. 무대가 아닌 밀림 속에 전통 가면과 의상을 입은 배우를 놓고 찍은 작품이 무척 좋았거든요. 이번에 백자 사진전은 1989년 한 잡지에서 유럽의 할머니와 함께 있는 항아리의 사진을 보고 받은 인상이 비로소 작품이 된 거예요. 사실 그 전에 뭔가 존재하다 빠져나간 공간을 찍는 작업을 많이 했어요. 먼지 쌓인 빈 방을 찍은 연작이 있었고, 은수저 함이며 군인들의 견장을 넣었던 빈 상자처럼 물건이 있다가 빠져나간 눌린 흔적이 남은 단순한 박스들을 찍는 작업도 했어요. 그러다 내가 이렇게 외국의 상자들을 찾아다닐 이유가 있을까 자문하면서 오래전 본 백자의 이미지가 되살아난 거죠. 작품은 쌓였던 경험이 어느 순간 모세혈관처럼 합쳐지며 나오는 것이지, 당장 이것부터 해야지 한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백자는 기품 있고 무욕의 아름다움을 지닌 반면 사진으로 표현하기에는 지나치게 갈등이나 괴로움이 없는 피사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보는, 그리고 찾는 대상물이 바뀐 거죠. 과거에는 좀더 처절하고 연민을 일으키는, 고통스러운 구석에 내몰린 대상들을 찾아다녔어요. 내가 아니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처럼 절실한 아픔을 직접 보여줘야만 치유가 된다고 믿었는데 이젠 달라졌어요. 이번에도 여전히 백자가 수백 년간 몸에 새긴 흠집을 따라 찍긴 했지만, 20년 전 느낀 뼈아픈 고통은 많이 흘러나간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하면 가장 낮은 목소리로 같은 떨림을 전할 수 있을까 자꾸 연습하게 됩니다.

-사진은 길고 복잡한 일생을 거칩니다. 필름에 상이 맺히고, 인화되고 액자에 넣어져 특정한 크기로 전시되고, 때로는 책으로 편집되기도 하죠. 선생님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단계가 진본, 달리 말해 사진의 궁극적 상태인가요?

=결과적으로는 좋은 책이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데, 우리나라에서는 인쇄나 제본이 아주 흡족하게 나오는 일은 아직 드물어서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면 결국 전시가 최선의 상태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외국 작가의 경우 내가 책으로 감동받은 일이 많아요. 로버트 프랭크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작품을 실제로 보면 오히려 책만큼 감동이 안 오더라고요. 내가 구식이라서 그런지 아무래도 이미지는 내 손바닥 위에 있을 때 감동이 오래가는 것 같아요. 전시장에서는 액자며 주변 환경이 있으니 아무래도 작품뿐 아니라 공간을 보게 되죠. 전시를 할 때는 사진만 멋지게 찍어서는 안 되고 공간과 액자와 이미지가 총체적으로 어울려야 성공해요. ‘굿바이 파라다이스’를 전시할 때는 아예 자연사박물관에 곤충 상자를 납품하는 분을 대전까지 내려가 찾아서 규격을 똑같이 맞추었어요. 잠깐. (꽃대를 세우러 나가는 조수들에게 간섭한다) 꽃이 비바람에 뒤집어져서 다시 비 오기 전에 바로잡아야 하는데, 젊은 친구들은 이파리가 어디를 보아야 햇빛을 향해 바르게 섰는지 몰라요. 참 안타까워요. 나는 딱 보면 알거든요. (웃음) 나 때문에 조수들이 괴롭죠.

“나는 오래 관찰하지 않아도 사람의 기운이 느껴져요”

-지금 30대들은 아마 선생님이 촬영한 에스콰이아 광고 사진을 많이 기억할 거예요. 그 작품이, 사진작가들이 패션 사진을 많이 촬영하는 계기가 됐다는 견해도 있고요.

=에스콰이아와 보티첼리 사진 작업을 오래 했죠. 아버지가 섬유업에 종사하셨기 때문에 원래 패션에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열다섯살 때 일본에서 나온 아타카라는 패션 사진 달력을 오려둔 걸 지금도 갖고 있으니 신기하죠. 학교에서 패션과 디자인을 함께 가르쳤기 때문에 귀국 전에도 패션을 전공한 친구들의 학기 말 쇼나 모델 지망생의 얼굴 사진을 찍을 기회가 있었어요. 그것을 감히 포트폴리오 삼아 귀국한 뒤 김희애씨를 모델로 ‘논노’ 일을 했고 소냐라는 모델과 에스콰이아 비아트 사진을 1988년에 찍었어요.

-배우들은 이따금 “사진을 찍히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인디언들의 오랜 견해에 동의하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피사체와 사진작가의 교감이 에너지로 필름에 스며든다”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요. 비슷한 맥락일까요?

=그렇죠.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모델도 상대에게 그 느낌을 발휘해줘야 해요. 아무것도 없는데 찍을 수는 없거든요. 찍히는 순간 상대에게 애정을 갖고 바라보거나 자신의 기가 나와야 필름에 담겨요. 진짜 배우는 자동으로 그것을 발휘하지만 평범한 모델은 찍는 사람이 잘 리드해야죠. 자만일지 몰라도 나는 미리 오래 관찰하지 않아도 그 사람의 기운이 느껴져요.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80, 90%는 읽히죠. 거기에 빠르고 예민하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죠.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 다수와 <기쁜 우리 젊은 날><영원한 제국><세기말><죽어도 좋아><밀애><댄서의 순정>의 티저 포스터 등 영화 포스터 작업도 많이 하셨습니다.사실 제가 맨 처음 접한 선생님의 사진은 <기쁜 우리 젊은 날> 포스터의 황신혜씨 사진일 거예요. 베일을 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린 마음에도 한참 눈을 떼지 못했죠.

=포스터로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이 거리에 붙은 첫 작품이었는데, 너무 기뻐서 동네 가게 담을 찍어놓은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요. 유럽처럼 멋진 포스터나 인쇄물을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었거든요.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배 감독하고 나의 모교인 연세대 입구와 홍대 앞 카페에서 찍었는데 시절이 달라서 안성기·황신혜씨가 와도 사람이 몰리지 않았죠. 그때 50만원을 받고 일했어요. 이태원 사장님이 “이제 구 작가가 우리 포스터는 다 찍어야 한다”고 하셨죠.

-태흥영화사에서 오랫동안 일하신 송혜선 이사님 말씀이, 그때 황신혜씨 사진이 너무 예뻐서 예고편에도 썼는데 사진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요. <경마장 가는 길> 포스터도 당시 인상적인 작품이었는데요. 송혜선 이사님이 포스터 찍으러 배우들과 도착하니 선생님이 침대 등을 세팅해놓으신 스튜디오에 음악을 틀어놓고 와인을 건네주신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때는 지금처럼 전문적인 스타일 담당자들이 없을 때라서 내가 상황을 다 연출했죠. 아마 한국영화 포스터로서는 처음이었을 거예요. <경마장 가는 길>은 내가 작품으로 표현하려는 이야기와도 통하는 작품이었어요. 농담 반 진담 반 태흥에서 전속 작가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그즈음 마침 일이 바빠지기도 해서 신세대 영화감독들과는 같이 일할 기회가 적었죠.

-포스터 작업할 때는 시나리오를 철저히 분석하고 현장도 자주 방문하시죠?

=배우들의 감정도 상황만 허락하면 촬영현장에서 찍어야 진짜지, 스튜디오에서 가짜로 만들면 아무래도 어색해요. 임권택 감독님은 인정 안 하실지 몰라도, 내가 포스터 사진을 찍어서 영화가 조금 달라지는 일도 있었어요. <축제>는 현장에서 원래 심각하게 찍으려다가 누군가 갑자기 재미난 이야기를 해서 한꺼번에 폭소를 터뜨린 순간을 우연히 포착했는데, 임 감독님이 그 이미지가 너무 멋있다고 하셔서 쓰게 됐어요. 나중에 보니 영화에도 제가 찍은 스틸이 많이 들어가고 웃는 장면도 중요한 모티브가 됐죠. <태백산맥>은 전경에 불을 지펴 연기를 피우고 뒤에 배우들이 나오게 했는데, 포스터 분위기가 영화에 재현되기도 했고요. 사실 <취화선>도 장승업이 지붕 위에 올라가 술 마시는 것이 내 아이디어였어요. 내가 볼 때 그 정도 망나니면 지붕까지 올라가야 하거든요. (웃음) 하필 촬영하는 날 맹장이 터져서 마무리짓지 못했는데 영화 속에도 나중에 그 장면이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현장에서 “셔터 소리 내는 사람, 누구야!”라고 푸대접도 받았는데 나중에는 임권택 감독님이 포스터의 중요성을 인식하셔서 <서편제> 때는 오정해씨와 따로 반나절 시간을 얻어 찍을 수 있었죠. 감독님 따라 지방 촬영지를 여행한 것이 한국적 요소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어요. 혼자는 좀체 길 나서지 않는 사람인데 영화촬영에 묻어서 이곳저곳 풍광을 볼 수 있었으니 감사하죠.

“결국 내가 찾아다닌 것은 시간의 박제였어요”

-신혼부부에게 초대받은 적이 있었어요. 두 사람과 가까운 친구가 비스듬한 각도에서 스냅으로 포착한 결혼식 사진을 확대해서 걸어놓았는데 의례적인 웨딩 사진보다 특별해서 좋았습니다. 당사자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 판박이 가족 행사 사진이 재미없을 때가 많아요.

=개인이 좀더 취향을 내세웠으면 좋겠어요. 제자들에게 숙제를 내주고도 그림이 보여요. 학생들이 사는 집이 거의 똑같잖아요. 아파트 아니면 연립이고 들어서면 오른쪽에 에어콘이 세워져 있고 소파가 길게 있고 맞은편에 TV, 왼쪽에 식당이 있겠죠. 그렇게 구조가 똑같은 곳에 살면 상상력도 당연히 제한되겠죠. 남들 하는 것을 따라 해야만 안심이 될 거고요. 외국에 가면 볼거리가 풍성한 까닭은, 비싼 물건이 많아서가 아니라 하찮은 일을 재밌어하며 매달리는 사람의 열정이 들어 있는 물건이 많아서거든요. 정성 들여 수집한 머그컵으로 카페를 하거나, 스탠드만 별난 재료로 만든다거나. 사진은 현실을 도큐멘트하는 일이니 각자의 개성이 발휘되어 세상이 더 재밌어지면 사진 찍는 일도 더 즐거워질 겁니다. 요즘은 도시를 찍고 싶은 욕망이 자꾸 줄어들어요. 8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지방 도시들이 하나같이 서울과 비슷해지고 있거든요.

-디지털 기술이 영화촬영에 도입되면서 영화에 뭐가 나온다고 카메라 앞에 그것이 반드시 존재했다는 보장은 사라졌습니다. 어떤 이미지를 찍는다기보다 만드는 쪽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 사진이 아니라면 이야기하고 싶은 목적에 맞춰서 디지털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디지털 이미지는 너무 빨리 사용되고 사라져서 아쉬워요. 이메일로 한번 보거나 한번 인쇄되고 나면, 아날로그처럼 저장되지 않아요. 아니, 저장을 해도 어디 있는지 묻혀서 그 이미지를 다시 보기 어렵죠.

-사진 찍기가 쉬워지면서 그저 찍었다는 사실만으로 삶을 보존할 수 있다고 안심해 버리나봅니다.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가족사진들이 거의 그럴 테죠. 한번 찍어서 보고 말 뿐, 오랫동안 들여다볼 기회는 없어졌어요. 예전에는 인화된 사진을 빌려주면 꼭 돌려받았는데 지금 사진 CD를 일일이 챙겨 돌려받겠다면 그 사람이 바보 되잖아요?

-다음 작업도 동시에 진행하고 계신가요?

=저기 보이는 목각인형들은 의뢰받은 일거리인데 인형 얼굴을 클로즈업 하다보니 예전에 탈을 찍은 작업과도 연관이 되네요. 아까 말씀드린, 사물이 빠져나간 빈 상자들의 작업도 좀더 하고 싶고요. 탈과 백자를 거쳤으니 이제 한국적 풍경과 건축을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이를테면 명성황후라는 주제로 그의 흔적을 찾아 경복궁이나 그가 시해당한 장소를 돌아본다거나. 그리고 닳고 닳아 아주 얇아진, 없어지기 직전의 비누들도 많이 모아놓았어요. (웃음) 새것보다 사람 손이 한번 갔다가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을 좋아해요.

- 백자 사진 전시회에서 한순간 항아리들이 관(?처럼 보였습니다. 선생님의 사진들은 어떤 식으로든 죽음을 상기시키는 것 같습니다.

=중앙대 한정식 교수님이 내 사진은 모든 것이 박제라고 하셨던가, 돌이켜보면 맞아요. 탈도, 사람 없이 껍데기만 남은 가면이죠. 백자도 거기 물이 들어 있거나 국이 들어 있거나 꽃이 꽂혀야 살아서 제 역할을 하는 것인데, 사진 속에는 내용물이 없잖아요. 결국은 시간의 박제였어요. 내가 찾아다닌 그 많은 것은. (김혜리)